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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몇장 얼룩있음
① 곡부성묘위안사실기(曲阜聖廟慰安事實記)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는 역대로 유교의 성지(聖地)로 인식되어왔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한대(漢代) 이래 곡부의 공자 유적은 역대 왕조를 거치며 끊임없이 국가의 보호아래 가꾸어졌다. 그중에서도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종택인 공부(孔府), 공자의 묘소인 공림(孔林)은 삼공(三孔)이라 하여 성지로 추앙되어 시대가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유교적 지배층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족(漢族) 왕조에서는 물론 거란족, 몽고족, 만주족 등 이민족의 왕조가 들어섰을 경우에도 곡부의 공자유적은 국가의 지속적인 보호를 받았다. 1930년 6월 곡부에서 군벌(軍閥)간의 전투(閻錫山、馮玉?與蔣中正決裂,五月起雙方大戰。中央軍稱?南軍,閻馮的西北軍是北軍)가 벌어져 곡부성과 공묘(孔廟) 등 공자유적은 상당수 손상되었다. 이러한 공자 유적의 손상은 공자이래로 수천년동안 없었던 사변으로 조선 유림에게도 더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의 설립자인 안순환(安淳煥)이 중심이 되어 조선유림들은 대표를 곡부에 파견하여 공묘와 공자 후손을 위로하기로 하였다. 이에 박연조(朴淵祚), 안승구(安承龜) 2인은 12월 24일 산동성(山東省) 지부(芝부)에서 배를 내려, 육로로 유현(유縣: 현재의 유坊), 제남(濟南)을 거쳐 곡부성(曲阜城)으로 들어가 공자종손의 저택인 공부(孔府)에서 연성공(衍聖公) 공덕성(孔德成)을 만나고, 사당인 공묘에서 조선식으로 고유의식(告由儀式)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공자묘소가 있는 공림(孔林), 안연(顔淵)을 모신 안자묘(顔子廟), 무우(舞雩), 주공묘(周公廟)등을 둘러보고 곡부의 유림 및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1931년 1월 4일 박연조, 안승구 2인은 곡부를 출발하여 제남에서 기차를 타고 천진(天津), 산해관(山海館)을 거쳐 봉천(奉天)에 이르러 다시 기차를 타고 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곡부 방문후 곡부의 공교회(孔敎會)와 교류를 유지하여 진주(晉州) 도통사(道統祠)에 공교회(孔敎會) 지회(支會)를 창설하고,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는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여 조선 유교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② 안순환(安淳煥 혹은 安敎煥, 1871∼1942)
1909년경 이왕직 사무관을 사퇴한 뒤 대령숙수들을 데리고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동아일보사 자리)에서 유명한 명월관을 개점하고 이후 태화관, 식도원 등을 경영했다. 안순환은 흔히 조선시대 마지막 궁중요리사로 알려져 있다. 민족 정기를 되살리는 데 뜻을 두어 기미독립선언 때는 33인 민족대표가 그가 경영하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도록 주선하였다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민족정기를 되살리려고 금천구 시흥동 169-53 일대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길러냈으며 이어 단군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32년 조선유교회를 녹동서원에 창립하여 교정을 지냈다. 1970년에 녹동서원을 해체하여 목재는 용인의 한국민속촌으로 이전해 갔다.